산골짜기의 편지
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,
환이*
2018. 9. 18. 05:52
70년대, 한국의 이발소에는 밀레의 만종(晩種)과 푸쉬킨의 ‘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’라는 시가 걸려 있었다. 그것도 무슨 유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발소를 몇 번 다니고 나면 자동적으로 그 시를 암송하게 되었다.
거울 앞에 앉아서 머리를 깎다 보면 거울에 비쳐진 그 액자의 글씨가 좌우로 뒤집어져서 보인다. 그걸 억지로 읽으려고 하니 자연히 외우게 되는 것이다. (이해가 안 되시는 분은 책을 펼쳐 놓고 거울로 비쳐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).
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/ 푸시킨.
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
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.
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
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.
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
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
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
지나간 것은 응당 그리움이 되리니.
20대엔 겁도 없지만 고민도 많을 때이다. 내가 바로 그 세대였으니 위의 시가 가슴에 와 닿았었다. 그때, 시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었다.
70대가된 지금 같은 시를 음미해 본다.
젊었을 때는 미래라는 여백이 한없이 길게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마음의 여유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여유가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제한적이다. 그래서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게 아니라 현재에 사는 것 같다.
일견, 현실에 충실하려는 그 자체가 마음의 여유가 아닐까 하는 객기(客氣)를 부려보면서 하루를 보냈다. 9/17/18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