차례(茶禮)와 제사(祭祀).
공자의 제자인 계로가 ‘귀신을 섬기는 것’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었다.
“사람도 제대로 못 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?”라고 했다.
“감히 죽음에 대하여 여쭙습니다”
“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?
위의 대화에서 공자가 생각하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할 수 있다. 그럼에도 그가 제례(祭禮)를 만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.
세상을 떠난 조상에 대한 효(孝)란 그들이 생존해 있는 것처럼 모시라는 의미도 될 수 있겠고,제사는 형제들이 나누어서 지낼 수 없다는 불문율로 묶어서 자손들이 제사나 차례에 모임을 통하여 서로 불목할 수 없게 하려도 의도도 있을 것이다.
귀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정성을 드린 음식을 준비해야 하니 그게 제물들이다. 무엇이든 그 원리나 이유를 알면 힘이 들더라도 그것을 감내(堪耐)하기가 수월하다. 그런 절차가 없이 ‘옛날에는..’으로 시작되는 말로 일을 시키면 당연히 거부반응이 오게 마련이다.
풍습이란 하루 이틀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다. 5.16 혁명 직후에 가정의례준칙을 발표 하였다. ‘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 오는 것처럼’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려운 집에서는 제사도 큰 부담이 되었었다. 그런 허례허식(虛禮虛飾)을 없애기 위하여 3년상을 금지하니 1년상으로 줄었다가 요즘은 3일장으로 끝난다.
황희 정승이 젊었을 때, 산 중에서 날이 저물어 외딴 초가집에서 하루를 유숙하게 되었다. 젊은 부부가 그 날이 마침 그의 모친의 기일이라 하면서 지방을 써 달라고 했다. 상것들은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가 궁금하여 문틈으로 들여다 보니 이 젊은 부부가 제사를 지내다 말고 이부자리를 펴고 동침을 하는 것이었다.
괘씸하기도 하지만 그냥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는데 “손님, 아직 안 주무시면 젯밥 좀 드시유”라고 해서 안방으로 들어 가서 술 한잔 마시며 넌지시 제사는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었다.
“지들이 무슨 법도를 알 수 없으니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 차리고 그냥 절을 하는데 마침 손심 덕분에 오늘은 지방까지 붙였습니다. 어머니 생전에 ‘니가 각시랑 오손도손 사는 걸 보지 못하고 죽는 게 한이다’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어머니 혼백에 보여 드리려고 상 앞에서 각시랑 같이 잡니다”
거기에서 황희는 크게 깨달은 게 있어서 ‘형편과 처지가 법도보다 우선한다’는 좌우명으로 살았다고 한다. 그래서 청상과부가 된 자기 며느리를 개가 시키려고 하니 사돈의 극심한 반대에 며느리는 내 자식이라는 주장으로 거부하면서 개가(改嫁) 시켰다. 그 시대 양반집 가문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.
명절은 가족을 한자리에 모아 놓는 순기능이 있다. 우리가 명절에 대한 추억이 있듯이 지금 아이들도 먼 후일에는 같은 것을 추억할 것이다. 이곳은 오늘이 추석이니 어제 내 조국을 지나온 그 둥근 달을 보면서 고향산천의 안부를 물어 볼 참이다. 10/4/2017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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